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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를 "잣나무"라고 부르는 향수 사이트들
By 향수모아 9월 01, 2026 0
어느 날 향수 하나의 노트 구성을 찾아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베이스 노트에 "잣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그 향수는 톰 포드 우드 계열 향수였다. 잣나무라니, 어딘가 익숙한데 향수랑은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원문을 확인해보니 "Cedar"였다. 시더. 향수에서 정말 자주 나오는, 우디 계열의 대표 원료 중 하나다. 그런데 이걸 "잣나무"로 번역해놓은 거다.
향이 아니라 나무가 틀렸다
잣나무(Pinus koraiensis)는 한국에 흔한 소나무과 나무다. 시더(Cedrus, 또는 조향에서 흔히 쓰는 버지니아 시더 Juniperus virginiana)와는 속(屬)부터 다르다. 향도 완전히 다르다. 시더는 연필 깎을 때 나는 냄새, 마른 나무의 온기 같은 향을 낸다면, 잣나무는 그냥... 한국 야산 냄새에 가깝다.
궁금해서 이 오역이 실제로 향수 하나에만 있는 문제인지 확인해봤다. 노트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보니 "Cedar"라는 원료 하나가 무려 23,056개 향수에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 파보니 문제는 더 컸다. Cedar뿐 아니라 Cedarwood, Cypress, Atlas Cedar, Virginia Cedar, Himalayan Cedar, Texas Cedar 같은 서로 다른 원료 13종이 전부 "잣나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었다. 시더(측백나무과)와 사이프러스(편백과)는 완전히 다른 나무인데도.
이게 왜 생기는가
향수 데이터베이스 대부분은 결국 어딘가에서 자동 번역을 거친다. 대형 향수 정보 사이트도 다국어 페이지를 기계번역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고, 이 데이터를 가져다 쓰는 국내 사이트들도 검수 없이 그대로 노출하는 경우가 흔하다.
기계번역이 "Cedar"를 "잣나무"로 옮긴 이유는 짐작이 간다. 두 단어 다 "소나무과 침엽수"라는 대분류 안에서 어딘가 엮였을 거다. 사람이 보기엔 명백히 틀렸지만, 통계적으로는 "그럴듯한" 오역이다. 이런 오역은 딱 봐도 이상한 경우보다, 그럴듯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경우가 더 위험하다.
다른 사례들
Cedar만 찾아본 건 아니다. 실제로 여러 향수 데이터를 대조해보니 비슷한 패턴이 꽤 나왔다.
- Sandalwood를 "산달나무"라고 쓴 경우가 있었는데, 실제 표준 표기는 "샌달우드"다. 이 원료는 35,796개 향수에 쓰인다.
- Amber를 "호박"이라고 쓴 경우도 있었는데, 표준 표기는 "앰버"다. 38,534개 향수에 쓰인다.
- Ambergris도 똑같이 "호박"이라고 쓴 경우가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원료로 "용연향"이라고 불러야 맞다. 6,899개 향수에 쓰인다.
- Immortelle를 "무궁화"라고 쓴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는 "이모르텔"이라는 꽃이다. 930개 향수에 쓰인다.
- Pepper를 "고추"라고 쓴 경우도 있었는데, 향수에서 Pepper는 거의 항상 후추를 뜻한다. 4,467개 향수에 쓰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Amber와 Ambergris가 둘 다 "호박"으로 번역돼 있던 것이다. 앰버(합성 레진 계열 향료)와 앰버그리스(향유고래 유래 원료, 용연향)는 완전히 다른 원료인데, 한국어로는 똑같이 "호박"이라고 나온다. "호박"이라는 단어 자체도 한국어에서는 채소나 보석을 먼저 떠올리게 만들어서, 향수 원료라는 느낌이 아예 안 산다.
Pepper를 "고추"로 번역한 것도 흥미로운 사례다. 향수에서 "Pepper"라고만 쓰면 거의 항상 후추(스파이스)를 뜻하지, 매운 고추를 뜻하지 않는다. 반면 "Chili Pepper"는 진짜로 고추가 맞다. 같은 "Pepper"라는 단어가 문맥에 따라 완전히 다른 답을 요구하는데, 기계번역은 이 구분을 못 한다.
그래서 어떻게 확인했나
의심스러운 표기를 찾으면, 그냥 "이게 맞는 것 같다"로 끝내지 않고 실제 근거를 찾으려 했다. 국내 조향 관련 판매처나 향료 쇼핑몰이 실제로 그 원료를 어떻게 부르는지, 백화점이나 편집숍에서 그 브랜드나 제품을 어떻게 표기하는지 대조하는 식이다. 여러 출처가 서로 다른 표기를 쓰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억지로 하나를 고르지 않고 "확인 필요"로 남겨뒀다. 틀린 걸 확신 있게 우기는 것보다, 애매한 걸 애매하다고 인정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해서다.
왜 이게 중요한가
향수 노트 하나 잘못 번역된 게 뭐 그리 큰일인가 싶을 수 있다. 근데 향수를 고르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다르다. "시더 향 나는 향수를 찾고 있다"고 검색했는데, 정작 데이터베이스에는 "잣나무"라고 적혀있으면 검색에 안 걸린다. 반대로 "잣나무 향"이라고 검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정작 그 원료를 쓴 향수 23,000개가 전부 이 이상한 이름표를 달고 있는 셈이다.
향수 정보 사이트를 만들거나 향수를 파는 입장이라면, 이 노트 이름 하나하나가 실제로 상품을 찾아지게 만드는 검색 키워드다. 틀린 번역은 그냥 오타가 아니라, 팔릴 수 있었던 상품이 안 팔리게 만드는 문제다.
이 글에서 다룬 표기 검증은 향수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일부다. Cedar, Amber, Sandalwood 외에도 100개 넘는 향료 노트와 어코드, 브랜드 표기를 같은 방식으로 대조하고 검증했다.